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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번주 풍경소리

  • 이번주 풍경소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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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1. 이번주 풍경소리


착한 목자 권일신 주교가 용문사에 간 까닭은?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
엊그제 목요일에 용문사를 방문하였다.(2015. 4. 22.) 권일신 성현이 용문산 절에 가신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.
권일신 성현이 왜 용문산사를 찾아가 8일간 피정을 하였는가를 회상하면서, 변기영 몬시뇰과 함께 경내를 둘러보았다. 돌아보던중, 용문사 대웅전 앞의 안내판 글에서, 그 이유를 확인하는 큰 수확을 얻게 되었다. 권일신의 14대 할아버지요 개국공신 권근이 용문사에 모셔진 큰 스님 정지국사의 부도비문을 작성하여 모셨다는 내용을 확인하면서, 권일신 성현이 평상시에도 양근 감호 뒷산의 용문사를 자주 찾아,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으며, 정신을 수양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.(양촌집 38권, 정지국사 부도비 참조)
 
을사년1785 박해로, 이벽을 중심으로 명례방 집회가 열리던 중, 추조금리들에게 적발되어 성물을 다 빼앗기고, 집주인이던 김범우는 매를 맞고 귀양을(밀양 단장으로) 가게 되었다. 이 때 권일신이 추조의 판서(법무장관) 김화진을 찾아가, 나도 천주교 신자이니 잡아가던지, 아니면 성상을 다 내놓으라며 호소하였다. 개국공신 집안으로 학덕이 높아, 정조 임금도 그의 맏형 권철신을 문효세자(의빈성씨 송연의 아들, 1782-1786)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낙점해 놓고 있던 차라서, 김화진은 권일신 성현 일행을 잘 달래어 돌려보냈다. 이후 이벽 성조와 이승훈, 정약용 집안에서는 문중박해
가 일어나, 이벽성조는 순교하시고, 이승훈도 정약용도 드러나게 신앙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. 그러나 권철신.권일신 성현의 아버지는 경자년1780에 이미 작고하셨으므로, 권일신은 집안의 어른으로서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.
 
을사박해로 교회가 움츠려든 상황에서, 권일신 성현은 성령의 힘을 얻어 교회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피정을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. 그래서 1786년 봄 경, 옆 마을 도주울의 같은 년배 친구인 조동섬 유스티노와 함께 용문산을 찾아 8일 동안 피정을 하게 되었다. 이 피정의 결실로 평신도들이 스스로 성직제도를 세워, 이승훈도, 정약용과 정약전도 모두 신부가 되었고, 권일신은 주교로 활동하게 되었다.(달레 상, 322-) 평신도들이 세운 유사성직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2년 후에 인식함과 동시에, 조상제사 금령이 북경교회로부터 전달된 후인 1791년에, 권일신 성현은 교회의 교주로 지목되어, 용감하게 순교하시게 되었다.
 

<나는 착한 목자다.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.

 
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선조들인 평신도 지도자들은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의 역할도 그대로 다 실천하였다. 이벽 성조는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, 뒤를 이어 주교(교주)로 지목받던 권일신 성현도 1791년에 순교하시어, 착한 목자의 소임을 다하였다.
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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Writer : 김학렬 신부    Date : 2015-04-27 07:46   Hit. 4307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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